시에라리온 내전
시에라리온은 이번 에볼라 파동 때에 가장 희생자가 컸던 세 국가(라이베리아, 기니, 시에라리온) 중 하나이다. 2015년 2월 20일 현재까지 11,208명이 에볼라 양성 진단을 받았고, 이 중 3,421명이 사망했다(https://www.internationalsos.com/Ebola/index.cfm?content_id=397&language_id=ENG).
2013년 기준 인구 600만에 1인당 GDP가 겨우 $678.96에 불과하며, 평균수명 역시 46세밖에 되지 않는 이 나라는 수도의 이름인 프리타운(freetown)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전에 영국의 식민지 노예였던 아프리카인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들(크레올)이 1790년대 말부터 이 지역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생겨났다. 비록 이들의 정착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고, 대다수의 인구는 토착민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프리타운이라는 명칭은 처음 이주 정책을 담당했던 시에라리온 컴퍼니(Sierra Leone Company)에 의해 명명된 이후 계속해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이후 1808년부터 1961년까지 영국왕실의 직할식민지로 영국이 서아프리카 식민지들로부터 자원을 수탈하고 본국으로 이송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시에라리온은 독립 직후부터 줄곧 쿠데타와 내전을 번갈아 겪으며 불안한 안보와 정치 상황을 겪어 왔다.
[ 내전 1기 ]
시기: 1991 - 1996
주요 행위자: 정부군 <=> 반군 RUF(Revolutionary United Front)
배경
- 1961년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직후 실시된 간접선거에서 초대수상으로 SLPP의 밀톤 마르가이(Milton Augustus Strieby Margai)가 당선되고 1971년까지 줄곧 SLPP가 여당으로 집권하였다. 이에 야당 및 재야세력은 계속해서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2대 수상이었던 스티븐슨(Siaka Probyn Stevens)은 1978년 야당을 불법화하며 일당제를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 1985년 일당제 선거에서 스티븐스 전 대통령이 지명한 모모(Joseph Saidu Momoh)가 대통령에 피선되자 국내의 민주화 투쟁 소요는 증대되는 한편, 반정부세력인 RUF는 무력 투쟁을 개시하였다. RUF는 모모정권의 부패 이외에도 4만명에 이르는 레바논 정착민과 소수의 세네갈인들이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과 무역, 상업 등 시에라리온 경제의 70∼80%를 쥐고 있다는 점을 반란의 명분으로 들었다.
경과
-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1992년 4월에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모모 대통령을 축출하고 군사평의회를 구성하였으며, 5월에는 헌법기능을 정지시켰다. 신 군부는 RUF 반군의 활동을 제재하기 위해 라이베리아와 코트디부아리로 통하는 국경을 폐쇄하였으며, 1994년 4월에는 반군 장악 마을을 대부분 탈환하고 반군을 소탕하였다. 1996년 2월 군부와 RUF 반군 지도자 간 정전이 합의되었다.
- 1996년 군사평의회는 2월 26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카바(Ahmad Tejan Kabbah) 민선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RUF 반군은 대선 연기를 주장해 오던 자신들의 의사가 무시되자 정전을 깨뜨리고 다시 게릴라전을 개시하였다. 정부군과 반군은 게릴라전을 수행하면서 정전협상은 지속하여 1996년 11월 27일 카바 대통령과 코티디부아르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RUF 반군 지도자 산코(Sankoh) 간에 정전이 합의되었다.
[ 내전 2기 ]
시기: 1997 - 2002
주요 행위자: RUF/AFRC <=> ECOMOG
배경
- 1997년 5월 25일 1996년 쿠데타 미수로 구속된 코로마(Koroma) 소령을 대표로 하는 소장파 장교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카바 민선 정부가 14개월 만에 전복되고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다. 코로마는 정권 유지를 위해 쿠데타 직전까지만해도 총을 맞대고 싸우던 무장반군 세력인 RUF를 끌어들이기까지 하였다. 이후 AFRC를 구성하고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헌정을 중지시키고 정당과 정치적 집회를 금지시켰다.
- 그러나 RUF는 재빨리 쿠데타 세력들을 장악하여 코로마는 실권 없는 명목상의 AFRC 의장으로 전락하였으며, 이에 따라 정국은 더욱 혼란과 무질서에 휩쓸리기 시작하였다.
- 아프리카단결기구(OAU)는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감시단(ECOWAS)를 파견하여 합법적인 민선 카바 정권의 복귀를 위해 RUF/AFRC 세력과의 협의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ECOWAS는 RUF/AFRC세력에 대한 주변국의 경제 제재를 실시하였고, UN 안보리도 10월 8일 시에라리온에 대한 무기, 군수품, 연료 반입을 금지시켰다. ECOWAS와 UN 등의 압력이 일층 강해지자 RUF/AFRC 세력은 1997년 10월 23일 ECOWAS 대표단과의 회의에서 1998년 4월 22일까지 카바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합의하였다.
- 1998년 2월 12일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구성된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ECOMOG)은 시에라리온 정부청사를 접수하고, 1998년 3월 쿠데타에 의해 전복된 카바 민선정부가 8개월 만에 복귀했다.
경과
- 카바의 정권 복귀 후에도 쿠데타 잔존 세력 및 반군 저항을 지속하여 ECOMOG군과 전투를 이어나갔다. 특히 1999년 초 들어 반군들의 공세가 강화되어 수천 명 이상이 전투로 사망하였다. 5월에는 드디어 주변국과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로메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사태를 전기를 맞이하였고, RUF 반군들은 내전 기간 동안 자행한 무차별 살육, 손목 절단, 강간 등 범죄행위를 사면받는 대신 무장해제를 하기로 했다. 양측은 임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2년 뒤(2001년)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평화협정에 따라 1999년 10월 유엔은 유엔 시에라리온사무소(UNAMSIL)를 창설,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다.
- 유엔평화유지군의 파견으로 평화정착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 했으나, 평화유지군들이 반군의 잇단 공격에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등 2000년 전반에는 평화유지활동이 대실패로 끝났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800명의 특수부대 병력과 해군함정을 프리타운에 파병했다. 5월8일 프리타운 시민들이 RUF 반군의 잇단 무력도발에 항의하는 데모를 벌였고 이에 포데이 산코의 경호원들이 데모대에 총격을 가했다. 9명의 사망자가 생겨나자 AFRC가 산코의 집을 급습하여 1주일 후 포데이 산코를 체포, 전범재판에 회부하면서 반군 세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 포데이 산코가 극적으로 체포됨에 따라 로메 평화협정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2002년 5월 선거에서는 집권당 SLPP이 압승, 카바 대통령이 다시 집권했다. 2002년 7월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했던 영국군이 철수했으며, 2005년 평화유지군도 공식 철수했다.
출처
시에라리온 내전(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한국국방연구원)
김재명, "세계의 갈등 지도(8):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신동아 527호, 2003년 8월 1일, pp.51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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