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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첫빛의 일상/사색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아가기 - 정체성의 문제

아래 글은 2014년 12월 30일 혼자 노트에 끄적였던 생각들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2014년 12월 말 한해를 정리하며 친구들과 저녁을 하던 도중 새삼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저녁을 함께  친구들   명은 미국에서 출생한 러시아-폴란드-아이리쉬계 미국인다른  명은 리투아니아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와 이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한 미국인그리고 나머지  명은 중국에서 출생하여 6세에 미국으로 이민온 미국인이었다미국에 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확실히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뿌리(origin) 대한 정체성도 확실하다는 것이다본인이 이민 1세대이거나 1.5세대인 경우와 같이 비교적 최근에 이민이 이루어진 경우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 세대에 이민이 이루어진 경우라 해도 그렇다.

처음 유학을 나오던 2012나는 내가 코스모폴리탄이라 확신했다외교학과에 진학을 해서  외무고시를 보지 않느냐는 말을 숱하게 들으면서도 (사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는 처음 설치되던 1959년 당시 국가 외교관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니 이런 의문은 일견 타당한 것이었다. 내가 재학하던 당시까지도 여전히 여러모로 커리큘럼이 "대한민국" 국제정치 학자 혹은 외교관 육성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인간이기에 깊은 애국심과 소명의식을 필요로 하는 외교관은 나의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한국에서 나고 평생을 자라오면서 정체성에 대해 크게 고민할 일은 별로 없었다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이 국사 교과서로부터윤리 교과서로부터 심어지고 무의식 중에 강요되었지만그리고 비교적 단시간 내에 정치 발전과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이  안에 있었지만나의 머리는 언제나 코스모폴리탄을 지향했다가슴과 머리가 좀더 넓은 세상을 지향했고 넓은 세상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물론 외교관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금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하지만 나를 그렇게 규정짓던 정체성에는  변화가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대다수의 학우들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살아왔거나 일해왔던 것에 비해, 평생 한국에서만 자라왔던 나를 감추고자 의식적으로 내 안의 한국을 지우고자 했다. 한국 관련 행사나 세미나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페이퍼를 때에도 한국 관련 주제는 의식적으로 지워버렸다. 친구들이 자랑스러운 한국 가수 싸이(Psy) 열광할 때에도 관심이 없는 행동했다. 나는 어쩌다보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태어났을 뿐이지, 코스모폴리탄을 지향하는 나에게 어떤 한국 가수의 세계 시장에서의 선전에는 관심이 없다는듯이... (사실 아이러니하지만 SAIS Korea Club에서 language table leader 및 총무로 활동하면서 international dinner 등의 문화 행사에는 참여하긴 했다. 심지어 당시 한국 학생으로 Korea Club에 참여하는 학생은 내가 유일했다. 단순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했다기보다는 한국에 관심을 갖는 다른 학우들을 내가 갖고있는 능력으로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같다.) 그로 인한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음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추상적인 관심 이상의 지속적이고 학문적인 관심을 가져본적 없던 아프리카를 제2전공으로 공부하면서 언제나 다른 학우들에 비해 뒤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똑같은 리딩 리스트를 가지고 공부를 해도 상대적으로 시간도 많이 걸리는데다 이해력도 떨어지고, 이해한 바를 세련되게 표현하고 포장하는 능력도 뒤쳐지는데 하물며 경험도 부족했다. 대부분이 아프리카에 대해 학부 때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거나, 이를 심지어 공부했거나, 일하다 왔거나, 하다 못해 얼마간 살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는 너무나 부족해보였고 내세울 없어보였다. 나의 경험의 폭은 상대적으로 너무 보잘 없고 좁은 것으로 느껴졌기에 공부하는 내내 괴로워했다. 일부러 Africa Association 활동에도 열심히 찾아가고 이후에는 vice president 활동까지 했지만 여전히 이런 내가 클럽을 대표할 있을까라는 자격지심에 소심해졌었다. 코스모폴리탄으로 불리기에는 언어 구사력도, 지식도, 문화적 감수성도 모두 부족했다. 코스모폴리탄을 지향하면 지향할수록 나는 현실과 지향점 간의 괴리에서 괴로워했다. 

번째 학기에 수강했던 "Ethnicity, Identity & Politics in Africa" 수업은 마지막까지도 다가오지 않았던 개념과 함께 이도저도 아닌 정체성에 괴로워하던 나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한편, 와중에도 여름 인턴십 준비를 위해 resume와 cover letter를 수없이 고민하고 고쳐써야 했는데, 여전히 나를 "selling"하기위해 내가 내세울 것은 한국인으로의 정체성, 한국에서의 경험이었고, 그 모든 것이 지워지면 A4용지에는 하얀 여백만이 남았다. 그렇게 다시 의식적으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컴퓨터 화면 안의 한장 짜리 파일에서의 나를 규정짓는 용어들은 단지 그이외에는 내세울 없는 나를 지켜줄 방패막이자 홍보용이었을 , 인턴십을 구하고나면 다시 사라질 그것이었다.

 

1년이 지나고 3학기도 마쳐갈 때쯤 문득 정체성의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주로 토론으로 진행되었던 "The Role of Religion in Contemporary International Policy Issues"라는 수업에서 나는 한국을 많이 끄집어내야 했다. 아프리카 관련 수업의 경우, 머리 속에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도 내가 혹시 역사에 대해, 맥락에 대해, 현재 정치 상황에 대해 모르고, 혹은 리딩할   이부분을 간과해서 등등의 회의감과 소심함에 자신감이 줄어들었는데, 주제에 보다 포커스가 맞추어진 수업일 경우에는 좀더 긴장이 풀어지고 정말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낼 수가 있었다. 더구나 리딩 리스트에 버젓이 "Kim, Andrew E. 2000. “Korean Religious Culture and its Affinity to Christianity: The Rise of Protestant Christianity in South Korea(Kim, 2000)"라는 논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공부해서라도 한국의 종교 상황 등에 대해 설명해야 것이었다. 다른 국가들에서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종교 분포, 다이나믹스(dynamics), 정치적 맥락 등은 다른 학우들도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일만한 것이었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플러스(+) 되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계기였다.

이후 나를 구성했던 많은 용어들이 다시 한번 공허한 수사가 아니라, 정말로 나라는 사람을 채우고 있는 이야기이자 나를 차별화할 있는 가치가 되었다. 아프리카 관련 수업을 들을 때도 주어진 국가의 정치적 맥락이나 상황이 우리나라도 이전에 경험한 것이었는지, 혹은 어떻게 달랐는지까지 눈여겨 보게 되었다불교에는 "돈오점수"라는 용어가 있다. 점진적으로 수행해 갑작스레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깨달음이 우선한다는 해석도 있다.) 계속된 고민 끝에 경험은 나의 정체성과 태도에 모두 변화를 가져왔다. 정체성이 뿌리내려야 곳은 근거없는 자부심이 아니라, 혈통과 족보가 가진 역사와 경험이라는 자산이었다. 그리고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정체성도 나를 규정하는 모든 수사를 스스로 이해하고 내재화한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곱씹어보아야할 문제이긴 하지만, 얼핏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세개의 정체성을 무리없이 갖고있는 친구들(이탈리아 혈통을 가진 미국인, 혹은 프랑스인이자 독일인 ) 아마 해법이 되지 않을까싶다. 정체성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반드시 양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이해한 만큼 절충이 가능한 이러한 고민의 과정은 이제 즐거운 균형잡기가 하다.

 

*조금 논외의 이야기로,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향할 때에도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것만큼이나 고급 한국어를 구사해야 진정한 지식인이라 생각했기에 온갖 언어들을 혼용하는 것에 대해 굉장한 거부감을 가졌었다. 여전히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글에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쓰는 것이 민망하기는 하지만, 어감 등을  고려했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영어를 불가피하게 사용했다. 때로 당시 내가 처했던 상황이나 감정들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에 영어가 효과적이라 사용될 때에도 영어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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